1 Corinthians 15:55–58 "Love That Conquered Death, Victory Fulfilled in Resurrection"
오늘 우리는 4월달의 주제인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주제설교의 마지막 부분의 해당하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단순히 부활에 대한 지식정보를 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직면한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이 무엇인지, 그 두려움과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떻게 정복되는지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죽음 앞에 먼저, 무기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은 통제가 안됩니다. 내가 어떻게 더 살아보려해도 죽음은 어느덧 내 앞에 직면한 문제가 되고, 내가 얼마나 이 죽음앞에서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에게 깊은 패배감을 안겨줍니다. 마치 전쟁에서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전사의 심정처럼, 그저 희매해져가는 의식과 기억과 경험들이 소멸되면서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패배감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아가 죽음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삶 전체를 흔들어 버립니다. 염려와 불안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과 슬픔과 혼란과 분노같은 다양한 감정이 뒤흔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살았는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왜 흔들립니까? 개인의 삶만 아니라, 결국 예배 공동체가 붕괴 직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생각이 교회안에 깊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를 나왔어도 여전히 헬라 철학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그저 “영혼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육체는 중요치 않으니 육체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교회다니면서. 그래서 나쁜 짓을 해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아버지의 아내를 강간한 자식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런 짓하고도 교만한 자식을 보면… “크면 괜챦겠지, 크면 변화겠지”… 아무리 기다려도 교만한 자식이 잘 바뀌지 않는 바울의 내면의 답답함을 호소하는 심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고전15장 말씀에 와서, 바울이 그들의 철학을 뒤집어 엎을 만한 복음을 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 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믿음 안에서 산 자는 영생으로, 불신 가운데 산 자는 심판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부활의 신앙으로 살았던 자들에게는 57절 말씀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이 3가지의 혼란 즉, 인생의 무기력, 인생의 패배감 그리고 인생의 흔들림속에서 응답받게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첫째. 죄와 율법의 쏘는 힘은 십자가로 무력해졌다ㅡ는 것입니다. (55-56)
55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 곧 죽음은 우리를 “무력과 패배와 흔듦”을 안겨주지만, “영생과 승리와 구원”은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셔서 구원으로 이끌어주실 [더 큰 전사]로 오셔서 사망을 제압해버리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속에 “이기는 것, 쏘든 것”은 마치 1) 벌이 자기 집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독침을 쏴서 이긴다는 뜻이고, 2) 뱀이 입을 벌려 물어 독을 주입시켜서 완전히 죽여버리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벌은 침으로 공격하고, 또한 뱀은 물어 독을 퍼뜨리듯, 죄와 율법은 사람을 죽음으로 끌어갑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사망의 위협 앞에서 오히려 선언합니다. “너의 이김이 어딨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딨냐?”하며 죄와 율법이 주는 고통과 죽음을 완전히 무력화시켜버린 것입니다. 아무런 데미지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여겨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영혼적으로 데미지를 주었는데도 무너진 상황, 무너진 상처, 깨진 영혼에 주님이 오셔서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버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뱀에게 물린적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마지막 4번째 전도여행이었던, 로마행 배를 타고 가던중에 ‘유라굴로’라는 대풍을 만나 죽게되었을 때 간신히 살아 [멜리데]섬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멜리데 섬에 살던 토인들이 불을 지펴주었는데 바울이 나뭇가지를 집어 불에 넣으려는데 그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뱀이 바울을 물어버린것입니다. 그러자 토인들은 그 뱀이 아주 치명적인 독을 품을 뱀뱀이라는 것 알고는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바울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16:17-18).
죄와 율법은 자꾸만 소극적으로는 죄책감과 적극적으로는 또 범죄하게 만들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율법이 주는 정죄와 범죄로부터 묶여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8:1-2절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을 믿고 더 이상 정죄와 범죄에 묶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나는 해방되었습니다! 당신도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감사”
둘째, 승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ㅡ는 것입니다. (57)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죽음 앞에선 인간 실존은 폐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으로 이긴자입니다. 이 “이김”은 사망에서의 승리를 말해주고 있고, 이 승리(νῖκος, nikos)는 영광스러운 승리, 완전한 승리, 최종 승리에 대한 선언입니다.
초대교회때 폴리갑(Polycarp of Smyrna)은 화형을 당하면서도 “나는 86년 동안 주를 섬겼지만,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네. 어찌 내가 지금 나의 왕이자 구주를 배신할 수 있겠는가”말했습니다. 불길이 그를 삼킬 수 없어 벽처럼 그를 둘러 쌓고만 있었습니다. 결국, 군병은 칼로 그를 찔러 생명을 죽였습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바울과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또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는 골로세움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면서도 “나는 이미 주 안에서 죽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기를 원하노라”할 때 문이 열리고 배고픈 사자들이 달려들 때 그는 떨지 않았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순간 저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의 죽음은 부활의 씨앗이되어졌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을, 불신자들과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아 너의 이김이 어딨느냐의 교훈을 전해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스데반(Stephen)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교의 현장에서 그는 기이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본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셨고, 죽음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죽음 너머에 자신이 가야할 천국이 었고, 예수님이 계셨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은 결코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아 너의 이김이 어딨느냐?”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으셨지만 그의 시체를 가둔 무덤은 사흘후 빈 무덤이 되었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이 예수님을 가둘수 없음은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기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죽음아 너의 이김이 어딨느냐?”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예수 안에서 정복되었고 그를 믿는 성도안에서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다시 사는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 죽어도 천국“. 예수 믿는 성도는 죽음 너머 영생천국을 믿습니다!
셋째, 부활을 믿는 자는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힘쓰며 그것이 헛된 수고가 아님을 안다. (58)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사망이 주는 무기력과 패배감과 흔들림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받은 자들에게는 1)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2)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됩니다. 그리고 3) 그 모든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1. “견고하며 흔들리지 마세요!” 그저 명령이니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군대에 보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까지도 이런 강도높은 신앙을 요구한다면 누가 교회에 나오고 싶겠나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자율적 신앙생활을 하게합니다. “각자 알아서 신앙생활하세요 신앙은 자유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한 자유 방임도 아니고, 억지로 명령끌려가는 군사 훈련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감사의 삶이 되어야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끝까지 견디셨어야하셨던 사랑에 반응하는 순종으로서의 견고함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2.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세요!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주의 일입니까? 바울이 지금 ‘항상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한 것이 꼭 교회안에만 갇힌 일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안뿐 아니라 교회 밖, 사회생활속에서도 성실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도 주의 일입니다. 꼭 먼 나라로 가서 선교한다고 선교가 아니라 내가 머문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다면 그것이 또한 선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영혼에게 영혼의 따뜻한 말한마디를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섬김이고 배려이고 헌신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하십시오! 죄된 것이 아니라면, 악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주의 일을 한정하지 않으셨고, 또 그 일을 통하여 기뻐하실 것입니다.
3. 우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드리는 땀과 눈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헌신과 봉사가 때로 헛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얻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결과조차 없다면 우리 마음에 깊은 허무함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고전 15:58)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능력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 때문이 아니라, "주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억하시고, 주님이 갚아주시며, 주님이 끝까지 완성하실 일이기에, 우리의 헌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 지금은 그 결과가 보이지 않고, 열매가 더디 맺히는 것처럼 보여도, 주 안에서 흘린 눈물 하나, 사랑으로 섬긴 작은 수고 하나까지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차곡차곡 쌓여 영광의 상급으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 안에서 드리는 모든 수고가 영원으로 이어질 것을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기에,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흔들리지 않고,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로 서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내하며 흘린 땀과 눈물, 드린 헌신과 수고는 주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열매가 보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고 영광스러운 상급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을 믿지 않고, 오늘 드리는 모든 수고가 영원한 생명과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고,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됩시다. 죽음을 이긴 사랑, 부활을 이룬 승리를 붙들고 끝까지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