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축복과 사명] 주안에서 순종하고 사랑으로 양육하라!
본문
엡6장1-4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5-05-04

 엡6:1-4 주안에서 순종하고 사랑으로 양육하라!

Ephesians 6:1–4 "Obey in the Lord, and nurture with love."


게리 채프먼과 로스 캠벨이 지은 『아이들을 위한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서, “아이마다 사랑을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떤 아이는 ①칭찬의 말에 마음이 열리고, 어떤 아이는 ②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사랑을 느낍니다. 또 어떤 아이는 ③작은 선물, 어떤 아이는 ④부모의 헌신적 행동, 또 어떤 아이는 ⑤따뜻한 스킨십을 통해 사랑을 느낍니다. ▶제 딸 아이는 내가 말을 많이 하는 것과 스킨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깐, 나의 말과 스킨십이 대화하기에는 너무나 서툴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을 하더라도 설교하려하고, 스킨십을 하더라도 장난치며 옆구리를 찌르려하니깐 딸 아이가 딱 질색하는 스킨십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자녀는 부모로부터 진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서 6장을 기록하던 시대, 로마 제국 사회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1>로마 법학자 가이우스는 『법학 입문서』에서 “모든 자녀는 아버지의 권위 아래 있으며, 아버지는 자녀를 처벌하거나 심지어 팔 권리까지 갖는다”고 기록했습니다.

<2>철학자 키케로는 “아버지의 권위는 곧 신의 뜻”이라 했고, 세네카는 “자녀는 아버지의 그림자”라 하며 무조건 복종을 강조했습니다. <3>심지어 어떤 귀족 아버지가 아들을 가문에 불명예를 끼쳤다는 이유로 재판 없이 처형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합법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바울은 “너희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가정 윤리가 아니라, 당시 사회 질서를 뒤흔드는 복음적 혁명이었습니다: 가정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되어야 하고, 참된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주님의 방식으로 양육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한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부모와 자녀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주 안에서 하나된 가정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순종하라”–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1–3)

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성경은 단순히 "부모에게 순종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한 마디만 보더라도 이 말씀은 율법적 강요가 아닌 복음적 부르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 됩니다. 역으로 해석하면, 아이들의 마음과 인격을 억지로 눌러서 복종시키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자녀들이 부모를 향한 부르심의 목적이란 뜻입니다. ▶현재, 지금 제가 부모로서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함께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좋은 선물을 사오는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하여 헌신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뭘까? 요즘 딸아이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주 조금씩 말과 행동의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고분고분 말하려하고, 반항행동을 절제하려는 변화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작지만 그것이 제겐 행복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옳다지만, 그것이 강요가 아니라 주안에서 자녀를 부르시는 복음에 반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적 부르심에 서게 되는 자녀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주 안에서 자발적으로 반응하며 순종하는 삶을 배워가는 것이 옳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소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은 곧 법’이었습니다. 아이는 말도 하기 전에 복종을 먼저 배워야 했고, 말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억압적인 문화 한복판에서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했습니다. 권위보다 관계를, 두려움보다 사랑을 기반으로 순종하라는 혁명적인 외침이었습니다.


현대에도 순종은 오해되고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해”, “말을 안 들으면 매야”라는 식의 양육은 아이의 마음을 굳게 닫아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느낄 때, 아이는 비로소 귀를 열기에, 부모는 성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주는 성령의 음성에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아이는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아이는 부모의 말과 행동에 담긴 마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어떤 아이는 인정하는 말에, 어떤 아이는 함께하는 시간에, 어떤 아이는 작은 선물에, 어떤 아이는 헌신적인 행동에, 또 어떤 아이는 손을 잡아주는 그 따뜻한 스킨십에 마음을 엽니다. 이처럼 부모가 자녀의 마음에 다가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든 방식의 중심에는 단 하나의 진리가 흐릅니다. 그것은 사랑은 아이를 이해할 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식은 5-3=2, 2+2=4라고 합니다. 오해(5)도 세번(3) 물러나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 이해(2)와 이해(2)가 더해지면 사랑(4)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어에는 이해가 Understand이며 under+stand의 합성어인데 그 사람 밑에 서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고,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과 바꿔서 보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고 사랑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이해됩니다!”


2-3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삶은 단지 예의 바른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은 단지 마음 편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이끌어주시는 복된 인생의 통로자로 자녀를 인도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자녀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 삶도 안정되고 질서가 회복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 앞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은 ‘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앞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부모도 자녀도, 모두 주 안에서 서로를 향한 귀 기울임이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2.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사랑은 통제보다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4)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말씀은 단순히 ‘화를 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이를 감정적으로 몰아세우거나, 자존감을 꺾는 방식으로 키우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저는 아직 딸 아이가 유치원 어린애라고 생각했습니다. 딸 아이의 앞날만을 위해서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딸 아이는 “나도 알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틀어주었습니다. 가사가 흘러나왔습니다~ ㅡ난 알아요 이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 버려야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수가 알수가 있어요/ 사랑을 한다는 말을 못했어/ 어쨌거나 지금은 너무 늦어 버렸어/ 그때 나는 무얼하고 있었나/ 그 미소는 너무 아름다웠어ㅡ 딸이 이 노래를 가만히 듣더니 이 노래가 뭐냐고 물어온 것입니다. 사실, 나는 이 노래의 내용도, 감정도, 핵심도 모르겠는데 딸은 느낀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겠습니까? “사랑을 하고싶어 너의 모든 향기/ 내 몸 속에 젖어있는 너의 많은 숨결/ 그 미소 그 눈물 그 알수없는 마음/ 그대 마음 그리곤 또 마음 에 마음/ 그 어렵다는 편지는 쓰지않아도 돼”… 집에와서 AI GPT에게 이 가사를 넣고 물어봤어요? 너는 알겠니? 이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핵시이 뭔지? 빠르게 답해주기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과 미련이 핵심이고, 그 이별 앞에서 느끼는 후외사랑의 진심, 그리고 간절한 붙잡음”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애가 무슨 깊고 깊은 사연이 많았을까!” 

자녀를 무작정 노여움으로만 대하지 말아야하겠다. 비록 내보다 나이가 어려도 나보다 험악한 인생 그 내면의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엽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 빠로르기조떼(παροργίζετε)는, 지속적으로 화를 돋우는 반복적 행동, 곧 무시, 과도한 통제, 비교, 비난, 일관되지 않은 훈육 등으로 인해 아이 마음에 쌓이는 분노와 좌절을 의미합니다.


한 아이의 내면을 무너뜨리는 말 한마디, 눈빛 하나,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한숨, 무관심의 침묵… 부모는 의도하지 않아도, 아이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무언의 행동이란 것입니다. 


▶가끔은 아비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지금 말씀앞에 다시 생각하면, 아빠로서 말했던 그 변명이 아이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변명하는 소리였지 않았던가, 아이는 아빠의 변명하는 말 때문에 자신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아비의 말에 묻혀 살아야 했지 않았던가… 오직 아이의 소중함을 더 생각하며 말하고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사랑 안에서’ 양육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제자들을 억지로 통제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삶으로 보여주시고, 눈을 마주하시며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교훈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양육이란 말은 헬라어 엑뜨레페떼(ἐκτρέφετε)인데, 이는 ‘먹이다’, ‘자라게 하다’, ‘부드럽게 돌보다’는 뜻입니다. 즉, 양육은 훈련이기 전에 돌봄이고, 명령이기 전에 관계입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처럼 두려움으로 다스리는 아버지상을 무너뜨리고, 복음 안에서 돌보는 아버지, 가르치는 아버지, 사랑으로 훈계하는 아버지로 부모됨을 새롭게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자녀의 영혼은 길들이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정원입니다.

주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사랑의 눈길로 이 정원을 돌볼 때,

그 아이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납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6:1–4은 단순한 가정훈육지침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음의 초대장이요, 관계의 회복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는 순종을 통해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배워가게 하셨고,

부모에게는 권위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을 닮은 양육을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는 부모를 존경함으로 신앙을 배우고,

부모는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함으로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부모도, 완전한 자녀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연약함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머물 때,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작은 교회가 됩니다. 

자녀는 주 안에 순종하며, 부모는 사랑으로 양육합시다. 

그것이 복된 가정을 세우는 길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주신 에베소서 6장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사랑이 가정 안에 어떻게 뿌리내려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녀들에게는 부모를 존중하고 주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을 주시고,

부모들에게는 권위가 아닌 사랑으로,

노엽게 하지 않고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는 지혜와 인내를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성장하는 작은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우리를 주님이 붙들어 주셔서

자녀 세대가 믿음의 대를 잇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며 자라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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